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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市 文化遺産 忠景祠 探訪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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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宋珍國 (114.♡.27.84) 작성일10-11-19 01:10 조회8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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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全州市 文化遺産 忠景祠 探訪 2!

 日  時 : 2010年11月13日,09:00~17:00. 

 踏  査 : 南固山城→忠景祠→三暻寺→關聖廟→北藏臺→億景臺→萬景臺→南固寺→全州敎大.

 主  催 : 全州市 市民行動21 文化財 사랑회.

 目  的 : 南固山城의 保存常態 Moniter 및 文化遺産 探訪.

 人  員 : 宋 哲 孝(珍國)會員外 20餘名.

 寫  眞 : 添附하였습니다.


1. 李廷鸞의 位牌를 모신 祠堂으로써 1529년(中宗24년)~1600년(선조33년) 수찬 승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때부터 容貌가 단정하고 기골이 遵守하여 非凡한 氣象이었으며 남에게 뒤지기를 싫어하는 性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孝行이 극진하고 友愛도 돈독하였으며 남에게 뒤지기를 싫어하는 性品이었다. 그가 官職에 나가서도 그의 이러한 性品은 謀害를 입어 逆境에 처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2. 그는 1568년(宣祖1년) 增廣文科로 兵科에 及第했는데 그의 나이 40이 다 된 때였다. 그의 官階 進出은 47歲에 비로소 校書正字요 얼마 아니 되어 著作博士로 옮겼다. 1578년 典籍으로 昇進되었으나 鄭汝立의 배척으로 해미현감으로 밀려났다. 1580년 해미현감을 그만두고 있었다가 1581년에 다시 전적으로 기용되었으나, 다시 鄭汝立 일파에 시달려 6년동안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1587년 양재 도찰방으로 起用되었다.

3. 1589년(宣祖22년) 鄭汝立의 謀反事件때는 同鄕人이라 하여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으나 평소 그와 사이가 나빳으므로 면직에 그쳤다. 1590년에 다시 개성도사로 제수되었는데, 官權에 붙여 民間에게 橫暴를 부리는 무리를 묶어 볼기를 치고, 1592년 壬辰倭亂이 일어나던 해 봄 官職을 물러났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4. 官職에 있어서의 李廷鸞은 不遇했었다. 늦게 官職에 나가 邊方 한직으로만 전전하였으니 그의 性品도 性品이려니와 官運도 따라주질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비록 64세의 高齡으로 직을 물러났다 하더라도 나라에 대한 愛國忠情마져 식을 수는 없었었다. 여기에 우리는 우리고장 全州城을 지킨 義兵長으로 變貌한 李廷鸞의 다른 한면을 살펴볼 必要가 있다.

5.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壬亂의 勝利는 全羅道가 保全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全羅道 穀倉의 中心地인 全州城을 지킨 李廷鸞의 功勞가 더욱 높이 平價되어야 할 것이다.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瞬息間에 전 國土가 戰爭의 慘禍에 휘말리고 宣祖는 義州로 避難하는 不幸을 맞게 되었다. 이때 李廷鸞은 義兵을 모아 호종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부윤은 世上을 뜨고 통판은 全州의 軍卒을 이끌고 강화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全州性의 政勢는 不安하였다.

6. 그 때 全羅監査 이광은 8千名의 將兵을 이끌고 北進하던 중이었는데 宣祖가 의주로 播遷했다는 소식을 듣고, 公州에서 軍隊를 解散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병들의 반대에 부딛쳐 용인에 나아가 삼도의 將兵 5만을 指揮하여 싸웠지만 패하고 친병 소수만을 인솔하고 근왕이란 명목으로 避身하니 全州城은 더욱 소란하였다.

7. 그해 壬辰 7월 南海가 李舜臣 將軍의 活躍으로 封鎖하자 倭賊들은 陸路로 全州城을 侵略하고자 하였다. 全州를 向하여 몇개의 루트로 조여오고 있었으니 황간, 지례, 거창, 무주, 금산, 진안등이었다.

8. 그들의 첫번째 도전은 진안쪽과 금산쪽으로부터 일어났다. 같은 해 7월 8일 웅치(완주군과 진안군의 경계인 곰티고개)와 이치(대둔산에서 금산을 넘는 재)에서 피나는 激戰이 일어났다. 雄稚의 激戰으로 김제군수 정담과 변응정이 壯烈한 戰死를 했으며 이름 모를 高貴한 忠烈이 많이 犧牲되었다. 같은 날 이치에서는 權慄과 황진이 이끄는 부대가 적을 殲滅시키는 勝利를 거두었다. 이 兩 戰鬪에서 지칠 대로 지친 적들은 그들의 뜻대로 일격에 全州城 陷落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一段 退却하였다.

9. 7월10일 적들은 다시 情熱을 가다듬어 全州입구인 소양평에 육박하였다. 李廷鸞은 때를 놓치지 않고 적의 선봉을 꺽으니 적들은 다시 全州城을 넘실거리지 못했다. 처음 李廷鸞이 全州防禦를 하고자 나섰을 때, 먼저 家族과 노복들을 불러 모아놓고 누구든지 도망치거나 동요됨이 없도록 단속하였다.

10. 그 다음 그의 아들 도길과 윤계, 정협, 황포, 윤동설등과 모의한후 장정 700여명을 모아놓고 이르기를 "이성이 무너지면 호남이 위태롭고 호남이 무너지면 나라일은 끝장이 객사 문밖에 난다. 우리는 마땅히 신하된 몸으로 이성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하리라"하고 군사를 나누었으며, 그도 성을 순찰 하면서 여러 차례 집 앞을 지났지만 들리지 않았다. 만일의 경우 발바닥의 사마귀를 신표로서 염시 할 것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결 습(발과 다리를 감는 것)도 풀지 않았다. 남소산성과 萬景臺에 각각 100명의 伏兵을 潛入시켜 놓고 있었는데 마침 적의 척후병 넷이 나타나자 셋을 목베이고 하나를 돌려보내어 全州城의 守備가 堅固함을 알렸다.

11. 한편으로는 정협과 운계를 만마동(상관골짜기)에 보내어 복병시켰다. 낮에는 기치와 연막으로 군세를 위장하고 밤에는 횃불로 기세를 올렸다. 험준한 목을 찾아서 목책을 세워 적의 침입을 대비케 하였으니 적들은 감히 접근하지를 못하였다. 이리하여 全州城이 수호될 수 있었으니 李廷鸞의 卓越한 智略과 活躍은 길이 빛날 것이다.

12. 壬辰倭亂때에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전주성을 지킨 공으로 太常寺僉正에 기용되고, 1593년에는 奉常寺副正에 기용되고, 그 해 10월 서울로 환도하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다가 군기시정겸 비변사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 수원부사가 되었는데, 백성들의 稅金과 賦役을 輕減하는 善政을 베풀었으나 명나라 使臣에게 不遜했다하여 罷職당했다.

13. 1593년에 世子 光海君이 湖南을 巡察하며 全州에 들렀을 때 부민들이 그의 공로를 주달하여 통청대부에 올랐다. 1596년 공주목사에 기용되었는데 지방호족들의 橫暴를 막고 善政을 베푸니 豪族들의 謀陷으로 이 해 8月 職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 왔다. 1597년 丁酉에 다시 倭亂이 일어나 全州城이 위태롭자 그는 수성 부장으로 城을 지키게 되었다. 이 때 부윤 박경신은 事事件件 방해만 하였다. 나중에는 명나라 장수와 결탁하여 軍糧을 불 지르고 도망치다 邊山에서 죽었다. 李廷鸞이 서울로 올라가 비변사에 그 사실을 고하니 조정이 감동하여 그를 全州 부윤 겸 삼도소모사로 제수하였다. 그가 全州에 돌아 왔을 때 전주성은 사흘이나 적에게 짓밟혀 처참한 상태였다. 그는 民心을 수습하고 救恤에 힘쓰다가 그해 11月에 辭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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